관악산은 서울을 대표하는 명산 가운데 하나입니다. 최근에는 좋은 기운을 받는 산으로 알려지며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지만, 이미 240여 년 전 조선 후기의 명재상인 채제공 역시 이 산을 찾았습니다. 채제공은 1786년 음력 4월, 예순일곱의 나이에 관악산 연주대를 다녀온 뒤 관악산 기행(遊冠岳山記)을 남겼습니다. 이 글은 오랫동안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었으며, 현재도 수능 국어 지문으로 자주 활용될 만큼 문학적, 역사적 가치가 높은 작품입니다. 오늘날 관악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정상 인증을 목표로 하지만, 채제공은 자연을 감상하고 선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 산을 찾았습니다.
노량진에서 시작된 관악산 여정


1786년 5월 10일에 해당하는 날, 채제공은 노량진의 집을 출발했습니다. 함께한 사람은 하인을 제외하고 모두 '일곱 명의 양반'들이었습니다. 당시 채제공은 관직에서 물러난 상태였지만, 관악산을 향한 발걸음에는 여유와 기대가 담겨 있었습니다. 일행은 약 10리를 걸어 자하동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채제공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언덕에는 철쭉꽃이 만개해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꽃향기가 물 건너까지 퍼져 왔다' 지금처럼 봄철 철쭉이 관악산을 붉게 물들이던 모습이 240년 전에도 이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하 신위 집안의 별서, 일간정(첫 번째 쉼터가 된 정자)


채제공 일행이 쉬어간 곳은 '일간정(一間亭)'이라는 작은 정자였습니다. 이 정자는 훗날 조선 후기 최고의 서예가이자 문인으로 평가받는 신위 집안의 별서에 속한 건물이었습니다. 당시 북자하동에는 신위의 고조부 형제가 세운 별장이 있었으며, 그 안에 이로당과 일간정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이 일대는 관악산야외식물원과 호수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자하 신위를 기념하는 자하정과 흉상도 세워져 있어 당시의 흔적을 일부 느껴볼 수 있습니다.
무너미고개를 넘어 길을 잃다


휴식을 마친 일행은 계속 남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이후 현재의 무너미고개에 해당하는 지점을 넘으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었습니다. 무너미고개는 관악산과 삼성산을 나누는 경계이자 도림천과 안양천의 분수령입니다. 채제공은 이곳에서 말과 마부를 모두 돌려보냈습니다. 이후 지팡이를 짚고 칡넝쿨을 헤치며 계곡을 건너 산길로 들어섰지만, 예상치 못하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해가 저물 무렵 일행은 큰 어려움에 처했지만, 동행했던 이광국이 스님들을 데리고 돌아오면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베이스캠프가 된 불성암(선현들도 머물렀던 수행의 공간)


채제공 일행이 도착한 곳은 불성암이었습니다. 현재 안양시 관양동 일대에 위치한 불성사와 같은 장소로 추정됩니다. 이곳은 단순한 산중 암자가 아니었습니다. 조선 후기 남인 학파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관악산을 찾을 때마다 머물던 중요한 거점이었습니다. 허목은 1678년에 관악산을 유람하며 이곳을 거쳤고, 채제공의 스승인 이익 역시 1707년 관악산을 오르며 불성암에 머물렀습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불성암이 당시 관악산 등반의 대표적인 출발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험했던 관양능선 암릉 구간(연주대를 향한 본격적인 오름길)
다음 날 새벽, 채제공 일행은 스님들의 안내를 받아 연주대로 향했습니다. 불성암 뒤편 능선에 오르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깎아지른 절벽과 암릉이 이어졌고, 한쪽은 수백 미터 아래로 떨어지는 낭떠러지였습니다. 채제공은 거대한 바위 때문에 길이 막혀 엉덩이를 바위에 붙이고 양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이동했다고 기록했습니다. 현재의 관양능선 코스로 추정되는 구간입니다.
관음바위와 장군바위를 지나 현재의 KBS 관악산송신소 방향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지금도 관악산에서 손꼽히는 암릉 코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예순일곱 살의 채제공이 이 길을 직접 걸었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자아냅니다.
연주대에서 바라본 한양
험난한 길을 지나 마침내 연주대에 도착한 채제공은 한양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당시 정상에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은 바위가 있었으며, 이를 '차일암'이라고 불렀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양녕대군이 왕위를 양보한 뒤 관악산에 머물며 궁궐을 바라보던 장소라고 전해집니다. 강한 햇빛을 피하기 위해 차일을 설치했던 흔적으로 보이는 네 개의 구멍도 바위에 남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연주대 정상에서 채제공은 멀리 한양과 경복궁 방향을 바라보며 임금을 생각하는 시를 지었습니다. 관직을 떠나 있었지만 나라와 임금을 향한 충정을 잊지 않았던 그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지금의 관악산 정상과 옛 기록의 차이(실제 최고봉은 따로 존재)
현재 많은 등산객들이 찾는 연주대 인증석은 관악산의 대표 명소입니다. 그러나 실제 최고 지점은 기상관측소 레이더 보호돔 인근의 불꽃바위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입이 통제되어 있어 일반인은 접근할 수 없습니다. 채제공이 기록한 차일암 역시 현재의 인증석보다는 정상부 인근의 다른 바위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됩니다.
관악산의 기운을 받아 다시 꽃핀 인생(화려한 관직 복귀)
채제공은 관악산을 다녀온 뒤 놀라운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그해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며 정계에 복귀했으며, 이후 정조의 신임을 받아 국가의 핵심 인물로 활약했습니다. 정조의 화성 건설 사업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고, 좌의정과 영의정에 오르며 조선 후기 정치의 중심에 섰습니다. 관악산의 기운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인생의 전환점 때문입니다.
관악산을 가장 편하게 오르는 방법
관악산 정상까지 가장 수월하게 접근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연주암 템플스테이를 이용하는 방법이 알려져 있습니다. 일정에 따라 연주암에서 숙박하며 산사의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으며, 추가 비용을 통해 과천 방면 KBS 관악산송신소 인근까지 운행하는 시설을 이용해 이동 거리를 줄이는 방법도 거론됩니다. 다만 운영 여부와 이용 조건은 시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사전 확인이 필요합니다.
채제공의 관악산 기행이 남긴 의미
조선 후기의 학자와 관료들이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 선현을 존경하는 마음, 그리고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향한 희망이 담긴 기록입니다. 240년 전 채제공이 철쭉 향기 가득한 관악산을 걸으며 느꼈던 감동은 오늘날 관악산을 찾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봄철 붉게 피어난 철쭉 사이를 걸으며 관양능선과 연주대를 바라본다면, 조선 최고의 명재상 가운데 한 명이 남긴 관악산의 발자취를 더욱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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